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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영의 KPGA 선수사 1] 최초의 프로 연덕춘

남화영 기자2022.12.01 오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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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덕춘이 1941년 일본오픈을 우승하고 트로피를 든 모습.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가 창립된 지 올해로 54년을 지나고 있다. 해외 여러 투어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지만 오늘날 한국 남자 골프는 급성장했다. 세계 최대 무대인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활약하는 선수 중에 김주형, 임성재 등 한국 선수들이 아시아에서 맹주로 떠올랐다. 투어 선수(TP) 번호 1번 연덕춘에서 7032번까지 늘어난 오늘날 국내외 투어에서 5승 이상을 거둔 선수들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연덕춘은 1916년생의 한국인 최초의 프로 골퍼다.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뚝섬에서 2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가족은 어느 해 뚝섬에 홍수가 나서 화양리로 이사했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1930년에 오픈한 경성컨트리클럽(CC) 군자리 코스에 가까이 살았던 관계로 소학교 때부터 골프를 알았고 소학교 졸업 후에는 경성CC 캐디마스터로 일하는 친척 김종석을 만나러 갔다가 캐디 마스터실의 보조 자리를 얻어 취직하게 된다. 골프와의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어린 연덕춘은 골프장 소속 프로였던 시라마스(白松)로부터 받은 클럽 1개로 연습하면서 프로의 꿈을 키우게 된다. 16세 때 시라마스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클럽의 프로 자리가 공석이 되자 당시 경성골프클럽에서는 조선인 프로를 앉히기로 했다.

골프장에서는 3명의 후보를 두고 심사에 들어갔다. 연덕춘과 캐디마스터 김종석, 그리고 식당 주임인 배덕산(창립회원 배용산의 형)이었다. 18홀 라운드 결과 연덕춘이 이븐파를 쳐서 결국 선발됐다.

왼쪽이 21세때 스윙, 오른쪽은 56년 런던월드컵 때의 스윙[자료=KPGA]

실력이 나날이 좋아지자 경성CC 멤버인 방태영 씨의 도움으로 연덕춘은 1년간의 일본 골프 수업을 떠나게 됐다. 신장 167cm에 체중 65kg의 당시로는 좋은 체격을 가진 18세 연덕춘은 34년 12월에 일본 도쿄의 골프계 거물이던 아카보시의 도움을 받게 됐다.

그는 경성CC 코스 설계자이자 제1회 일본오픈(27년)에서 프로를 제치고 우승한 일본 골프계 거물이었다. 당시 아카보시의 주장은 일본에 와서 수련을 쌓으면서 일본오픈, 일본프로선수권에 차차 출전케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후지사와CC에서 아카보시의 알선으로 만난 헤드 프로가 33년 일본오픈을 우승한 나카무라였다. 실력자에게 골프를 배운 연덕춘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일본으로 넘어간 지 3개월만인 35년 2월에 관동골프연맹으로부터 프로 자격증을 획득했고 3월부터는 매월 관동프로월례회에 나가 평균 85.6타의 기록을 냈다. 그해 10월에는 일본오픈에 처음 도전했지만 미스 컷 했고 이듬해 4월 귀국하기 전까지 꾸준히 관동 프로 월례 경기에 출전했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프로 자격을 획득한 연덕춘은 귀국 후 경성CC 전속 프로로 근무했다. 한동안 그는 회원들의 레슨을 맡았고 지방에 생겨나던 골프장의 초청을 받아 시범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큰 대회가 열리면 일본으로 건너가 출전했다. 37년 일본오픈에서 8위를 했고 이듬해엔 공동 5위로 마쳤다. 38년 일본프로골프선수권에서 3위를 차지했고, 이듬해 9월에 일본프로골프선수권에서 다시 3위를 했다.

1941년 5월 총 73명(아마추어 24명)이 출전한 일본오픈에 출전한 연덕춘은 4라운드 합계 290타를 쳐서 우승했다. 26세 때의 우승으로 신문에도 대서특필됐다. 조선반도 서울 변두리 군자리의 한 캐디 소년이 골프를 접한 지 10년 만에 이룬 성과는 충분한 기사감이었다.

그런데 이 대회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열린 메이저였다. 가을에 예정됐던 일본프로골프선수권은 열리지 못했고 이듬해에는 일본프로골프선수권에서 2위를 차지했지만 이 해에는 또 일본오픈이 열리지 않았다. 43년은 태평양전쟁 말기로 경성CC를 비롯한 한반도의 모든 골프장이 폐장되면서 대회도 선수도 없었다. 일본오픈은 49년에야 재개됐다.

일본오픈 우승 당시 일본에 소개된 기사.

1945년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으나 이내 한국전쟁으로 국내는 다시 폐허가 됐다. 최초의 골프 선수였던 연덕춘의 프로 생활은 전쟁의 참화속에서 사라졌다. 다시 클럽을 잡게 된 것은 군자리 코스가 복구되어 개장한 54년이나 이미 그의 나이는 마흔을 바라보게 됐다.

이후 57년 필리핀오픈에 출전해 6위, 영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박명출과 짝을 이뤄 출전해 개인전 28위를 기록한 것은 긴 공백을 감안하자면 뛰어난 결과였다. 58년에 열린 제1회 한국오픈에서는 미국 선수 무어에게 패해 국내 최초의 내셔널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서는 정상에 올랐다.

60년에도 홍공오픈에서 8위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이후에는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 후배 양성과 코스 설계라는 ‘제2의 골프 인생’을 설계하게 된다. 연덕춘을 주축으로 친목 단체의 성격을 띤 프로골프회가 결성된 것이 63년이다. 이 모임의 회칙은 프로 골퍼 자격 부여 규정과 함께 골퍼들이 지켜야 할 의무 조항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사실상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의 출발점이 됐다.

노년기의 한 행사장에서의 연덕춘 [사진=KPGA]

후배 양성에도 힘 쏟은 그는 한장상을 비롯, 홍덕산, 이일안, 강영일, 조태운 등을 길렀다. 그래서 68년에 한국프로골프협회를 발족했다. 초대 허정구 회장 아래서 상무를 맡았고 72년에는 제2대 회장에 취임해 프로의 세력 확장에 힘썼다. 아울러 코스 설계가로도 활약하면서 한양CC 올드 코스를 비롯해 동래, 인천국제, 제주, 수원, 태광, 여주, 양주 등 10여 개 코스를 만들어내면서 선수로 이루지 못한 꿈을 코스에서 구현했다.

2004년 향년 88세로의 사후에 그가 쓰던 클럽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KPGA는 그를 기리기 위해 시즌이 종료된 후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덕춘상’을 시상한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한국 프로골프와 함께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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