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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GA의 어제①]공식 대회의 시작과 협회의 창설

이지연 기자2018.12.31 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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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장상. 그는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총 7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대회 최다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사진 KPGA]

*편집자주: 1968년 11월 12일 창설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2월 발행된 KPGA50년사는 KPGA의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과 내일을 통해 미래를 유추해보기 위한 기획이다. 남자 프로 골퍼들은 물론 팬들, 업계 관계자들이 함께 만들어 그 의미를 더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의 역사는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 창설과 함께 시작됐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프로골프협회보다 프로골프 대회가 먼저 열렸고 프로 골퍼라는 전문 직업인이 생겨난 것은 이보다 한참 먼저다.
한국의 프로 골프 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한국인 최초의 프로 골퍼 연덕춘과 군자리 코스, 그리고 경성골프클럽이다.

프로 선수 탄생에 토양이 된 골프코스

한국 골프 최초의 프로 선수가 탄생하기까지 그 토양이 된 것은 최초의 골프장이었다. 한국 최초의 골프 코스는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조선철도국이 서울 용산 효창원에 문을 연 전장 2300야드 9홀짜리 골프코스다. 일각에서는 영국인들이 1897년 함경도 원산 세관 구역인 바닷가에 만든 6홀 코스가 최초라는 주장이 있지만 명확하게 검증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초창기 효창원 골프코스에서 라운드를 하는 골퍼들.[대한골프협회,사진으로 보는 한국골프사]

효창원 골프코스는 조선철도국이 경영하던 조선호텔 투숙객을 위한 곳이었다. 효창원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가 묻힌 왕실의 무덤이다. 1894년에 이미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청나라와 전쟁에 대비해 효창원 일대를 군부대 숙영 및 훈련장으로 쓰고 있었다. 여의도 면적 3분의 2에 이르는 광활한 땅에 울창한 숲이 우거진 효창원은 골프 코스가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효창원 골프 코스는 효창원이 공원으로 편입되면서 3년 만에 문을 닫고 청량리로 이전하게 된다.

효창원 골프 코스에 이어 등장한 골프장은 1924년 16홀 규모로 오픈한 청량리 골프코스(전장 3942야드)였다. 부지가 좁아 16번홀을 마친 뒤 1, 2번홀을 추가로 플레이해야 했던 이 곳에서 한국인들이 골프를 하기 시작했고,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청량리 골프코스 는 개장 5년 만인 1929년에 문을 닫았다.

1930년에는 최초의 정규 18홀 골프장이 들어선다. 지금의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영친왕의 하사금으로 지어진 군자리 코스(파 69·6160야드)는 ‘한반도 최초의 정규 18홀 골프장’이었다.

한국 골프는 ‘군자리 시대’를 맞아 빠르게 발전했다. 회원들의 기량이 향상되면서 자연스럽게 프로 골퍼가 탄생할 여건이 조성됐다. 초창기 프로 골퍼는 지금처럼 경기인보다는 골프 클럽 회원들의 기량 향상을 돕는 교습가의 역할이 더 컸다. 당연히 클럽에 소속돼 회원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았다. 한국인 첫 프로 골퍼 연덕춘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경성골프클럽 회원들의 뒷받침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초창기 한국 골프 발전 이끈 경성골프클럽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경성골프구락부’다. 경성골프구락부는 1921년 조선철도국이 조선호텔 고객을 위해 효창원 골프코스를 설립한 뒤 그 코스를 이용했던 일본인 고객들이 모여 사답법인체로 만든 단체였다. 서울의 옛 지명인 ‘경성’과 클럽의 일본식 한자어인 ‘구락부’를 더해 이름이 붙여졌다.

경성골프클럽은 골프장은 물론 모임을 통칭하는 단어로 쓰였다. 경성골프클럽 회원들은 지방에 골프장이 건설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때 대구(1923년), 평양(1928년), 원산(1929년), 부산(1932년) 등이 문을 열었다. 그런 이유로 경성골프클럽 주도로 만들어진 골프장에는 경성골프클럽 청량리 골프코스, 경성골프클럽 군자리 코스와 같은 지명이 붙었다. 경성골프클럽은 이 밖에도 일본 프로 골퍼들을 초청해 시범 경기를 갖거나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같은 골프 대회를 개최했다.

효창원 코스에서 시작된 경성골프클럽은 효창원 코스가 문을 닫으면서 1924년 청량리 골프코스로 옮겨갔다. 이후에는 군자리 코스로 다시 이전했지만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이 폐망하면서 경성골프클럽의 단체는 없어지고 골프장만 남게 된다.

경성골프클럽의 역할은 해방 이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이어졌다. 군자리 코스는 광복 이후인 1954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재개장했는데, 서울컨트리클럽 회원들은 대한골프협회의 전신인 한국골프협회가 설립된 1966년 전까지 한국 골프의 발전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경성골프클럽이 일본인이 주축이 돼 세워진 단체이긴 했지만 이들이 초창기 한국 골프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첫 프로 골퍼의 탄생

연덕춘은 1916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뚝섬(지금의 뚝섬)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집에서 가까운 군자리 코스를 지나며 골프를 처음 접했고, 16세 때인 1932년에 군자리 코스의 캐디 보조로 취직하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군자리 코스가 문을 연지 2년째였다. 일본에서 초빙한 시라마스라는 프로 골퍼가 클럽 프로로 일하고 있었다. 시라마스는 회원 뿐 아니라 캐디, 캐디 보조, 그리고 직원들에게도 골프를 가르쳤다. 시라마스에게 얻은 한 자루의 클럽으로 골프를 시작한 연덕춘은 타고난 재능으로 1년 만에 스크래치 골퍼가 된다.


연덕춘은 18세 때인 1934년에 경성골프클럽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다. 시라마스가 병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클럽 프로 자리가 비게 됐고, 회원들이 이 참에 신임 클럽 프로를 한국인으로 뽑자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연덕춘은 캐디·직원 등을 대상으로 치른 후보 선발 골프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회원들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18세 청년 연덕춘은 일본 가나가와현 후지사와 컨트리클럽에서 1933년 일본오픈 우승자이자 클럽 헤드 프로인 나카무라의 지도를 받고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연덕춘은 1935년 2월 일본 관동골프연맹에서 프로 자격증을 받으면서 한국인 첫 프로 골퍼가 됐다. 1935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 첫 출전한 그는 커트 탈락을 했지만 1937년 대회에서 8위에 오른다. 그리고 1941년 5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당시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태평양전쟁(1941~1945)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열린 대회였다. 전쟁의 여파로 그 해 일본프로골프선수권이 열리지 않았고, 연덕춘은 이듬해 대회에서 2위를 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1943년 군자리 코스가 폐쇄되면서 그의 선수 인생은 정점을 찍고 내려오게 된다.


이후 연덕춘의 역할은 경기인에 머무르지 않았다. 후배 프로 양성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신봉식, 심종현, 최재형을 클럽 프로로 키웠다. 나중에 박명출을 프로로 만들었고, 김학영, 김성윤 이일안, 한장상, 홍덕산, 배용산, 이동출, 조암길 등이 연덕춘의 지도를 받아 프로가 됐다.

한국프로골프협회 닻을 올리다

1958년 6월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나흘 동안 72홀 스트로크플레이로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치러졌는데, 당시엔 한국프로골프협회가 창설되지 않아 서울컨트리클럽이 대회 주관을 맡았다. 서울컨트리클럽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폐허가 됐던 경성골프클럽 군자리 코스를 1954년 복구해 이름을 바꿔 단 곳이었다.

다만 출전 선수는 고작 17명이었다. 게다가 프로 선수는 달랑 셋뿐이었다. 연덕춘, 신봉식, 그리고 박명출 등 셋만 프로 자격으로 출전했다. 나머지 14명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프로가 되려고 수업 중인 이른바 ‘양성자’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그 때부터 61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의 전통을 지킨 대회로 성장했다.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는 석 달 뒤에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제1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 앞서 열림으로써 ‘국내 최초의 골프 대회’라는 영예도 갖고 있다.


1960년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포즈를 취한 (왼쪽부터)한장상, 박명출, 이일안.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는 10년 뒤 한국프로골프협회 창설의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이 대회는 첫 대회가 열린 1958년부터 1963년까지 10명이 넘는 선수가 프로 자격을 얻으면서 전문 직업 경기인으로서 프로 골퍼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규정화된 프로 테스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프로 자격은 대부분 서울컨트리클럽이 부여했다. 1954년에 문을 연 서울컨트리클럽이 이런 역할을 하기 전에는 연덕춘이 제자 가운데 실력이 됐다고 인정하면 바로 프로 골퍼가 됐다.

1963년에 연덕춘은 ‘프로골프회’를 만들었다. 프로 골퍼끼리의 친목 단체였다. 회칙에 프로 골퍼 자격을 인정하는 절차와 프로 골퍼가 지켜야 할 덕목 등이 들어 있었다. 사실상 프로골프협회나 다름이 없었다.

프로골프협회의 창설은 프로골프회가 생긴 뒤 5년이 지나서야 성사됐다. 프로 자격 부여와 프로 골퍼의 해외 경기 참가 등 잡다한 업무를 맡은 서울컨트리클럽이 1966년 대한골프협회의 전신인 한국골프협회 창립에 나서면서 프로 골퍼의 뒷바라지에만 매달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프로골프협회 창설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프로 골퍼도 해마다 늘어났다. 서울컨트리클럽 헤드 프로로 일하던 박명출과 홍덕산이 한국프로골프협회 창설에 앞장섰다. 둘은 당대 최고 권력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형욱은 홍덕산에게 골프를 배우고 있었고, 중앙정보부 2인자 이병두 차장은 박명출에게 레슨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 부장의 경우 처음에는 골프를 싫어했지만 골프 애호가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권유로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가 1963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후부터 ‘골프광’이라고 할 만큼 빠져들었다고 한다.

한국프로골프협회 창설에는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1968년 봄, 박명출과 홍덕산이 라운드 중에 김형욱 부장에게 ‘협회를 만들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고, 이에 김형욱 부장이 경제계 인사들에게 ‘점심을 살 테니 나오라’며 중국식당 아서원(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으로 불러 모으게 된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제3공화국 중앙정보부장의 초청 자리에 경제계 인사들은 대부분 참석했고, 경제인 45명 정도가 모인 이 자리에서 김형욱 부장은 문학림 비서실장에게 협회 설립 필요성을 설명하도록 했다. 그러고 기업인들로부터 프로골프협회 창립기금을 모았다. 골프를 좋아하는 기업인과 서울컨트리클럽 회원이 그 대상이었다.

한장상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형욱 부장은 식사 후 방명록을 꺼내 참가 기업인들에게 성금을 내라고 했고 “최하가 100만원입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이들이 내놓은 돈은 2070만원에 이르렀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가치로 6억원에 가까운 거액이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프로골프협회 정관과 운영 방안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국프로골프협회는 이날 회동을 창립 총회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골프인 연덕춘, 신봉식, 박명출, 배용산, 김복만, 한장상, 한성재, 김성윤, 홍덕산, 이일안, 문기수, 조태운 등 12명은 창립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12명은 협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꾸려 한 달 뒤인 5월 17일 허정구 이사장, 박용학 부이사장, 연덕춘 상무이사 등 임원진을 구성해 한국프로골프협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당시 문교부에서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가를 받은 날인 11월 12일을 공식 창립 기념일로 정했다. 이사장과 부이사장 등 수뇌부를 기업인으로 정한 것은 후원 기업인이 일단 운영을 맡아하다가 적절한 때에 프로 골퍼들에게 넘긴다는 아서원 창립 총회 때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삼성그룹 공동 창업주이기도 한 허정구와 대농그룹의 전신인 대한농산 창업주 박용학은 한국프로골협회 창립에 이어 한국 골프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초대 이사진에는 신진자동차 설립자 김창원, 동아그룹 전신 충남토건 창업주 최준문, 현대건설 창업주 정주영 등 당대 최고의 기업인이 즐비했다.


친선골프대회 우승자에게 트로피를 주는 김형욱(왼쪽).

협회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고문으로 위촉됐다. 협회 창설을 위해 돈을 낸 기업인과 프로 골퍼들의 상견례를 주선한 그가 임원진에 포함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실무는 프로들의 몫이었다. 상무 겸 징계위원장 연덕춘, 프로양성위원장 박명출, 경기위원장 김복만, 섭외위원장 배용산, 룰위원장 한장상, 총무위원장 신봉식 등 실무는 프로 골퍼들이 맡았다.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과 함께 프로 테스트를 통해 프로 자격을 주는 명확한 기준도 생겨났다. 그 이전까지 한국에서 정식으로 프로 자격을 획득한 선수는 없었다. 1953년 서울컨트리클럽이 생긴 후 양성된 다수의 프로 골퍼는 연덕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신봉식 박명출을 비롯하여 한 장상, 김복만, 김성윤, 홍덕산, 이일안, 조태운, 문기수 등이 그들이었다.

협회가 설립된 1968년 이전까지 프로골퍼는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면 자격을 인정받았다. 첫째는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 우승자, 둘째는 지금의 대한골프협회의 기능을 했던 서울컨트리클럽의 ‘인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로 지망생을 총괄했던 연덕춘이 인정하는 선수가 프로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1968년 KPGA가 설립된 이후에는 정관의 규정에 따라 테스트를 통해 프로 골퍼 자격을 부여받았다. 협회 창립을 주도한 12명은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고, 실질적인 프로 골퍼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별도의 테스트없이 KPGA의 프로 골퍼로 등록됐다.

초창기 기틀을 잡은 스타들

연덕춘을 비롯해 한장상, 박명출 등 한국 골프의 초창기 스타들은 한국프로골협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고 회장을 직접 맡는 등 협회 행정에도 큰 기여를 했다.

협회 설립 당시 상무이사 겸 징계위원장을 맡았던 연덕춘이 1972년 2대 회장에 오른 것은 상징적이었다. 협회가 정·재계 요인들의 뒷받침으로 창립되었으나 프로 골퍼들이 직접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따라 1972년 12월1일 열린 2차 임시총회에서 연덕춘이 회장, 역시 프로 골퍼인 박명출과 배용산이 부회장에 각각 선임되며 제2대 임원진이 꾸려졌다. 연덕춘 이후에도 1970년대에는 프로 골퍼 출신 회장들이 연이어 당선되면서 협회를 키워갔다.

1976년에 3대 회장으로 선출된 박명출은 4대 회장까지 연임하면서 협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1975년까지 프로 대회는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와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 등 2개 뿐이었지만 1976년부터 민간 기업들이 골프 대회 스폰서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1979년에는 7개의 대회가 치러졌다. 박명출에 이어 1980년 5대 회장에 오른 김복만 역시 프로 골퍼이자 협회 창립 멤버였다.

한장상은 KPGA 초창기 실력으로 국위선양을 펼친 스타였다. 한장상은 1972년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의 스타 점보 오자키를 누르고 우승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프로골프협회(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 출전해 한국을 알렸다. 한장상은 이후 1984년에 6대 회장이 되면서 협회 행정에 관여하게 된다. 한장상은 회고록에 “나의 골프 인생에서 뿌듯한 일 가운데 하나가 한국프로골프협회 탄생에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고 썼다. 그는 6대 회장에 선출됐던 때를 회상하며 “1984년 취임 당시 내 나이는 마흔 다섯이었다. 난생 처음 치러본 회장 선거는 정말 힘들었고, 차라리 공을 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생각했다”며 “협회 발전을 위해 뛰어다닌 경험은 소중하지만 회장을 하느라 선수생활을 더 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까지도 KPGA의 재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창립 당시 3000만원이던 자산은 15년이 지나도록 4100만원에 불과했다. 한장상은 이에 기금을 모아 팬텀오픈(1984년) 등 새로운 대회를 유치했다.

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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